▣ 북한교회 성장의 배경
북한지방 기독교가 성장한 이유
북한지역은 옛부터 다양하게 이름을 불렀다. 고려 시대 때는 서계, 동계로 불렸고,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에는 경기도 이북의 북도라고 불렀다. 즉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를 가르킬 때 북도라고 불렀다. 이 말은 서북지방이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서북지방은 다시 관서(평안도)와 관북(함경도), 해서(황해도) 지방으로 불렀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서 미·소가 남·북한을 분할하여 무장해제를 하면서 한반도가 분할되어 남한과 북한으로 부르게 되었다. 북한은 1948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6.25전쟁으로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남·북한이 갈라져 북한은 대한민국에게 고통을 안겨주는 정치집단으로 실체화 되었다. 북한지방에 일찍이 기독교가 들어와서 북한교회는 크게 성장하였다.
북한지역은 어떻게 남한보다 복음의 성장 속도가 빨랐고 크게 성장했을까. 첫째로 지리적 요건이 꽤 많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믿는다. 북한은 만주지방과 연해주 지방 두 나라를 접경하여 역사상 대륙문화가 한반도에 유입되는 통로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불교가 대륙을 통하여 조선에 들어온 것처럼 기독교가 대륙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간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둘째는 조선시대 서북지방의 차별정책이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은 서북지방 사람들을 높은 벼슬에 임용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단종1년(1453년) 함경도 도절제사 이징옥의난, 세조13년(1467년) 이시애의 난도 서북지방 차별 때문이었다. 성종(1474년) 때는 서북인들의 인재등용을 제한하였고, 중종38년(1453년)에는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사람은 관원이나 왕의 측근으로 진출하지 못하게 하였다. 영조22년(1746년)에는 함경, 평안, 송도사람들과 영남 남인계와 서북계 사람들을 인재 등용을 억제하였다.
임진왜란(1592-1598년)때 서북지방에서는 의병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고, 함경도 회령의 아전들은 “우리는 조정에서 버림받은 백성이다. 우리가 누구에게 충성 하겠는가"라고 외치며 피난 온 왕자(임해군)를 체포하여 일본군에게 투항시켰다. 정묘호란(1627년), 병자호란(1636년)때에도 서북인 들은 수수방관하며 전쟁을 구경만 하였다. 서울 사대부들은 서북지역을 싫어했고, 대원군은 북한지역을 이렇게 혹평하였다.
"함경도는 진흥탕 속에서 싸우는 개(泥田鬪狗)이며, 평안도는 숲속에서 뛰어나오는 사나운 호랑이(猛虎出林), 황해도는 돌밭에서 밭갈이하는 소(石田耕牛(석전경우)이다"
다른 도에 비해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를 개, 호랑이, 소 등의 동물로 비유한데서보면 조정에서는 서북계를 대단히 차별하였음을 볼 수 있다. 서북계는 살아남기 위해 진취정신, 강인한 자주정신, 저항정신으로 살아왔음을 찾아 볼 수 있다.
서북지방은 왕과 조정 중신들에게는 대단히 미움과 배척을 당했지만 인류평등과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기독교만이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들에게도 베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북지방인들은 기독교에서 위로와 안위를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서북인 들의 특유한 정신, 진취정신, 자주정신, 저항정신으로 기독교를 확산시킴으로서 북한지역 기독교가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지역에 이렇게 기독교가 크게 성장한 복음의 확산은 남한은 물론, 중국이나 러시아 연해주까지 확산되었다. 이것이 한국교회 교인들의 믿음이었고 선교의 힘이었다. 교회 안에서는 비록 경제적으로는 낙후되고 궁핍한 자가 많았으나, 한국교회는 중국을 복음화하기 위해 선교지역을 나누고 선교사를 파송하고 경제적으로 엄청나게 지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중심에 있었던 교회가 북한교회였다.
아산동산교회 황기식 목사
(전 총회역사전문위원 / 한국교회언론협동조합 천안아산 지부장)
출처 : 가스펠투데이(http://www.gospel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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